성모 승천 성당
성모 승천 성당은 십구세기 뉴올리언스에 몰려든 독일 이민자들을 위해 레뎀토리스토 수도회가 1860년에 완공한 성당이다. 당시 이 동네에는 독일인과 아일랜드인과 프랑스인 신자들이 각각 자기 말로 예배드리는 성당을 나란히 두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인 이 성전은 붉은 벽돌을 정교하게 쌓아 올린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졌고 제대는 바이에른에서 조각해 실어 왔다.
사진: Wikimedia Commons
- 위치
- 루이지애나 뉴올리언스, 미국
- 분류
- 성지
- 교파
- 천주교
- 시대
- 1860
- 좌표
- 29.929097, -90.074725
성모 승천 성당은 십구세기 뉴올리언스에 몰려든 독일 이민자들을 위해 레뎀토리스토 수도회가 1860년에 완공한 성당이다. 당시 이 동네에는 독일인과 아일랜드인과 프랑스인 신자들이 각각 자기 말로 예배드리는 성당을 나란히 두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인 이 성전은 붉은 벽돌을 정교하게 쌓아 올린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졌고 제대는 바이에른에서 조각해 실어 왔다. 이 성당이 순례지가 된 것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젤로스 신부 때문이다. 바이에른에서 태어난 그는 1843년 미국으로 건너와 여러 도시에서 이민자들을 돌보았고, 늘 웃는 얼굴로 고해를 들어 주는 사제로 사랑받았다. 1866년 뉴올리언스로 옮겨 온 이듬해 황열병이 크게 돌자 그는 집집을 찾아다니며 병자를 돌보고 임종을 지켰으며, 그러다 자신도 병에 걸려 1867년 10월 마흔여덟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뉴올리언스에서 사역한 기간은 채 두 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2000년 시복되었으며, 유해는 성당 곁 기념 경당에 모셔져 있고, 지금도 병든 이를 위해 기도하려는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소박한 동네 골목 안에 감춰진 이 성전은 화려한 겉모습보다 한 사제의 마지막 몇 달을 기억하게 한다.
자주 묻는 질문
성모 승천 성당은(는) 어디에 있나요?
루이지애나 뉴올리언스, 미국에 있습니다. 위도 29.929097, 경도 -90.074725이며, 구글 지도 등으로 길찾기를 할 수 있습니다.
성모 승천 성당은(는) 어느 시대의 유산인가요?
1860 시기의 유산입니다.
성모 승천 성당은(는) 어떤 순례지인가요?
성모 승천 성당은 십구세기 뉴올리언스에 몰려든 독일 이민자들을 위해 레뎀토리스토 수도회가 1860년에 완공한 성당이다. 당시 이 동네에는 독일인과 아일랜드인과 프랑스인 신자들이 각각 자기 말로 예배드리는 성당을 나란히 두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인 이 성전은 붉은 벽돌을 정교하게 쌓아 올린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졌고 제대는 바이에른에서 조각해 실어 왔다.
성모 승천 성당은(는) 개신교 순례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그는 병이 도는 골목으로 매일 걸어 들어갔고, 결국 그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람을 살리려던 사람이 자기 목숨을 내려놓았습니다.
St. Mary's Assumption Church — New Orleans, Louisiana, US
St. Mary's Assumption was completed in 1860 by Redemptorist priests for the German immigrants who poured into New Orleans in the nineteenth century. In this neighbourhood German, Irish and French Catholics each had a church of their own language standing close together, and this one was raised in elaborate baroque brickwork with altars carved in Bavaria. It became a place of pilgrimage because of Father Francis Xavier Seelos. Born in Bavaria, he came to America in 1843 and served immigrants in several cities, loved as a cheerful confessor who turned no one away. He arrived in New Orleans in 1866, and when yellow fever swept the city the next year he went from house to house among the sick until he caught the fever himself and died in October 1867 at the age of forty-eight. His remains rest in a shrine chapel beside the church, where people still come to pray for the sick. Hidden on a plain back street, the building recalls a priest's last months more than its own ornament.